달빛의 소원 - 03

화서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최근 밤마다 잡생각이 드는 탓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을 일컫는 '심야 정서 증후군'이라는 유행어까지 생길 정도로 많은 청년들이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

심야 정서 증후군의 증상인 교류 기피, 업무 거부, 불면, 우울감…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증상인데, 그게 정확히 뭐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번아웃 증후군이 가장 비슷한 것 같긴 한데, 확실치는 않다.

아무튼, '효성' 역시 심야 정서 증후군을 겪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참 좋은 세상이다. 별게 다 병이 되니까.

이런 걸 우리는 '꼰대'라고 부르기로 합의했어요.

WHO는 '번아웃 증후군'을 실제 질병으로 분류하진 않았지만, 대신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문제 현상'으로 분류했다. 이는 해당 증상을 허깨비가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질병에 준하는 문제라고 보았다는 말이다.

재범에게 '효성'에 대해 묻자, 연구원 중에서는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다른 문장은 전부 제대로 말했으면서 왜 "제, 제가 찾아드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에서는 말을 잠깐 더듬은 걸까?

응?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한 데이터 분석'이 조약 위반이라고? 조약 이름이 '레드 라인 조약'인 것으로 보아, '이것 만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라고 합의한 모양인데…

솔라리스의 AI 수준은 실제와 비교해 굉장히 높아 보이지만, 정작 거기에 가해지는 제약은 꽤 큰 모양이다. 이 정도는 간단한 추론의 영역이니 허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행동 분석이 조약 위반이라는 항의를 들은 상리가 '자폭 기능 카운트다운'이라며 장난을 치는 바람에 분위기가 잠깐 싸늘해졌다. 다행히도 재범이 그럴 수도 있다며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아까 "너무 무거운 주제를 다루게 되면 적당히 재미있는 질문으로 넘어가겠다"라고 한 게 설마 이걸 말한 거였나? 이걸 성공적이었다고 말해야 할지, 실패했다고 말해야 할지 굉장히 애매하네.

상리가 달나무집의 로봇임을 눈치챈 재범이 황급히 자리를 뜬다. 원심 분리기 핑계를 대긴 했어도,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지.

분명 재범은 '효성'에 대해 알고 있다.

방랑자가 진철과 재범의 대화를 엿들었듯이, 다른 누군가가 방랑자의 대화를 엿듣고 있다.

여러 게임을 하며 다른 누군가의 대화를 엿들은 적은 많아도, 이렇게 역으로 당한 적은 한 손에 꼽을 정도라, 굉장히 신기하다.

방랑자: 이제야 믿음직스럽네요.
상리: 상리는 항상 믿음직스러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나, 이런 만담이 너무 좋아!

방랑자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건 '효성'의 친구, 국진이었다.

방랑자가 이미 '효성'을 만난 적 있다는 국진의 말에서 '효성'의 정체가 바로 재범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재범의 행동에서 '효성'과의 유사점을 찾을 수 없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성격 좋고 예의 발라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던 재범이 왜 갑자기 '효성'이라는 가명 뒤에서 그런 부정적인 글을 올리게 된 건지에 대해선 그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온 국진조차 알지 못한다. 심지어 그런 글을 올리기 시작한 이후, 재범은 국진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국진은 재범과 함께 에코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부상을 입어 손을 떠는 후유증을 안게 되었고, 프로젝트 역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국진은 재범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재범이 어쩌다 '효성'이 되어 그런 부정적인 글을 올리게 된 건지 알고 싶어 하는 국진에게 '효성'이 쓴 소원을 보여주었다.

재범은 자신 때문에 국진이 영구적은 후유증을 안게 된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국진은 그 일에 대해 재범을 전혀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진은 겉으로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주기까지 하는 재범의 속이 문드러진 것을 걱정하고 있다.

서로 진실한 대화를 했으면 쉽게 해결되었을 문제지만, 지금 재범이 의도적으로 국진을 멀리하는 상황이라 서로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방랑자가 나설 차례인 거지.

어릴 적부터 재범은 에코에 관심이 많았고, 프로젝트에 손을 떼기 전까지도 에코에 관한 실험을 했으니, 재범과 말을 붙일 때 에코에 대한 정보를 들고 가면 훨씬 수월할 거라고 국진이 알려준다.

상리요가 전해준 정보 역시 국진의 말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다.

소원지에 에코 실험 샘플 데이터 코드를 적었다 지운 걸 보면, 재범은 여전히 에코에 미련이 남아있다. 방랑자가 그 에코 데이터를 가져다주면 분명 말을 걸기 쉬워질 테지.

'금주성 장벽 바깥 호변에 있는 잔상은 분명 거랑급 그린멜팅카멜레온일 텐데…'라고 생각하며 목표 구역에 가니, 그린멜팅카멜레온 대신 경파급 오열하는 전사가 나타났다.

국진이 그린멜팅카멜레온이 내뿜는 불길에 맞아 후유증을 얻었다 생각했는데, 고작 경파급이라니…

아냐. 야귀군 제식 흑석 소총으로도 이런 잔상을 잡는 데에 한참이 걸리니, 국진이 부상만 입고 끝난 건 오히려 다행인 걸지도 모른다.

와, 상리에 원격 조종 기능이 있었구나. 이걸 이용하면 마치 방랑자 곁에 있는 것처럼 상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걸 알 수 있다고 한다.

방랑자가 상리 머리를 만지자 상리요가 평탄한 기계음으로 "아—"라고 하는데, 이게 묘하게 귀엽더라.

저 먼 수평선을 우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재범에게 다가가, 방금 수집한 에코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에코 데이터를 기반으로 산출한 물리 데이터의 운동 수치가 지나치게 높다는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재범이 그토록 원하던 에코 데이터가 바로 이것이라는 게 중요한 거지.

그래서일까, 재범이 염치를 불구하고 방랑자에게 데이터를 팔아달라고 부탁한다.

방랑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이 '효성'의 진짜 소원이냐고 묻는다.

'효성', 아니 재범이 정말로 원했던 건 소원지에 적혀있던, 죽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료, 국진과 함께 계속 에코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방랑자에게 에코 데이터를 팔아달라고 부탁한 거고.

자신이 '밤에만 불평을 늘어놓는 루저', '소위 말하는 보여주기식 「전문가」', 효성이라고 밝힌 재범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재범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자신과 달리 진짜 천재인 국진의 미래를, 자신의 실험 강행으로 국진이 영구적인 후유증을 입게 하여, 망쳐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입원한 국진을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을 정도로 재범은 실험에 몰두했으나, 결국 실험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텅 빈 실험실에서 재범은 이 모든 게 다 부질없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그 후 재범은 국진과의 만남을 피한 채 관심도 없는 일에 억지로 매달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놓을 수 없는 에코 연구가 매일 밤 머릿속에 떠올라 재범을 괴롭혔고, 그는 그 스트레스를 '효성'이 되어 억지로나마 풀고 있었던 거다.

재범의 말을 몰래 듣고 있던 국진이 나타나, 재범을 한 대 후려갈긴다.

그런 찐따, 수정해 주겠어!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거 같단 말이지.

언제까지 자기 탓만 할 거냐며 재범을 국진이 몰아붙인다. 재범이 "하지만…"이라고 하자 곧바로 "내 말 아직 안 끝났어!"라고 소리치는 걸 보면, 정말 화가 잔뜩 난 모양이다.

뭐, 이렇게라도 둘이 대화를 하고 있으니, 재범의 오해는 확실히 풀릴 것이다.

이제 저 둘은 방랑자가 없어도 알아서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효성의 소원이 이상 데이터의 근원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으니, 방랑자는 쿨하게구르며 떠나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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