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 - 04

소와 함께 잠깐 밖으로 나왔다.

소가 괜찮냐고 묻는데, 그건 되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안에서 안절부절못했던 건 소 아니었나?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거 봐 ㅋㅋㅋㅋㅋㅋ

소가 갑자기 모임 여는 걸 좋아하던 선인 이야기를 꺼내길래, 소 역시 류운차풍진군처럼 옛 친우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던 선인들과 달리,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말을 돌려 하는 상황에 익숙지 않아 불편해한 것이었다.

선인끼리 있었을 땐 가면이랄 것도 없이 다들 편하게 이야기했겠지만, 지금은 종려와 벤티가 '왕생당의 객경', '몬드의 음유시인'이라는 페르소나를 얼굴에 쓰고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농담 삼아 '이게 다 종려 탓이다'라고 하니, 대번에 암왕제군의 탓이 아니라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웁스. 소는 이런 데 민감하지, 참.

지금 종려는 예전 암왕제군 때와는 완전히 다른 페르소나를 쓰고 다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중이다. 그 모습이 소에겐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그냥 타인과 교류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소는 또 여행자와는 잘 지낸다. 본인조차 신기해할 정도로.

어디서 읽은 건진 몰라도, 소가 여행자와 있으면 업장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 건가?

소는 호두의 초대를 받고 신의 눈을 가진 사람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지만, 난 기껏해야 호두, 종려, 여행자 이 정도만 올 줄 알았다.

그래서 향릉이나 행추, 중운 등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소의 말을 듣고 '심원 대장'이 누군가 찾아보았는데, 이미 죽고 없는 바위 야차였다.

즐길 때면 즐기고 돌발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음, 소가 제일 못할 것 같은 거네.

 

심원 대장은 주변 사람들을 위해 곧잘 옷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옷을 선물 받는 것 자체가 '돌발 상황'인 거였을까?

부사는 심원 대장이 만들어준 옷을 입기 불편하다며 불평했다는데, 그냥 웃옷을 입기 싫어하는 성격인 것 같다. 층암거연 이벤트에 나온 회상 장면에서도 부사는 웃옷을 입고 있지 않았거든.

종려가 심원 대장의 옷을 좋아한다는 것이 꽤 의외이다. 심지어 지금 입고 있는 옷조차 심원 대장이 만들어준 옷이라니. 마신 전쟁 때에는 입지 않았다가, 지금은 열심히 좋다고 입고 있는 것 또한 의외이다.

소와 그리 오래 대화하지 않은 것 같은데, 향릉의 말에 따르면 다들 벌써 식사를 다 마치고 후식을 먹는 중이라고 한다. 거 참 시간 빠르네.

안 돌아오시길래 페이몬이 어찌나 걱정하던지, 디저트 맛도 못 느끼는 것 같더라니까요.

아니 ㅋㅋㅋㅋㅋㅋ 걱정한다면서 디저트는 또 잘 들어가나 보네 ㅋㅋㅋㅋㅋㅋ

'너무 걱정되어서 디저트를 입에 대지도 않고 있다'라는 서술이 나오는 게 보통 아냐? 하기야, 식탐 대마왕인 페이몬이 먹을 걸 입에 대지도 않고 있다는 게 더 보통 일이 아니겠지만 말이다.

내가 제대로 기억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평소 소는 망서 객잔의 언소가 만든 행인두부만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향릉은 소가 자리를 피한 이유가 연회의 음식이 평소 먹던 것과 달리 입에 맞지 않아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소는 항상 사라질 때 풍륜양립을 쓰며 훅하고 사라지는걸. 뭔가 기분이 나빠서 한시라도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의미로 보이기 충분하다.

마음씨 착한 향릉은 혹시나 연회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을 소를 위해 행인두부를 만들어 가져왔다.

심지어 이 행인두부는 소가 연회에 온다는 말을 호두로부터 전해 듣고, 예전 언소에게 배운 행인두부 조리법대로 만든 거라고 한다. 혹여나 연회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행인두부로 배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도록 말이다.

정말이지, 향릉은 사려가 정말 깊다.

소가 또 차갑게 향릉의 호의를 거절하려는 걸 막았다. 거기서 필요 없다고 하면 애써 행인두부를 만든 향릉의 노력이 뭐가 되겠나.

심지어 향릉은 자기가 만든 행인두부가 언소가 만든 것과 다를지도 모른다며, 소의 입맛에 맞게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알려달라고 한다.

향릉의 마음씨가 오늘따라 찬란하게 빛난다.

내 짐작이지만, 페이몬은 지금쯤 디저트를 열심히 먹느라 정신이 없지 않을까?


다시 돌아오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있다. 정말 소와 대화를 오래 했나 본데.

아니, 대화 텍스트 내용을 돌이켜봐도 그리 오래 이야기한 게 아니라니까? 페이몬이 잔뜩 긴장한 탓에 오래 기다린 거라고 착각한 거 아냐?

시간 관념이 이상한 게 뭔지 보여주겠어. 식사량이 이상한 게 뭔지도 보여줄 거라구!

시간관념이 이상한 거랑 식사량이 대체 무슨 상관이야 ㅋㅋㅋㅋㅋㅋ

저거, 분명 절반은 삐진 거고, 절반은 식탐이다.

봐라. 연회의 주인인 호두조차 '별일 없었다', '다들 잡담을 나누고 있었으니 신경 쓸 것 없다'라고 하잖아.

오늘따라 페이몬의 속이 한층 더 좁은 느낌이다.

흥, 난 지금 먹느라 바빠서, 널 무시할 거야.

저러면서 화면 밖으로 포로롱 날아가는 게 뭔가 귀엽더라.

호두가 갑자기 명절 연회 형식을 갖추자고 하기에, 내가 모르는 리월의 풍습이 있나 했는데, 그냥 호두가 즉석에서 지어낸 거라고 한다.

흠… 호두가 재미있다고 하는 건 호두 혼자만 즐겁거나, 보는 사람만 즐거운 그런 것이 많은데…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제일 존귀한 사람을 뽑아, 그 사람이 향에 불을 붙이도록 하는 거라고 한다.

어… 그러니까 이거 폭탄 돌리기지? 그치?

여기서 '내가 제일 존귀한 사람이다!'라고 자칭할 만한 간 큰 사람은 호두를 빼면 없을 텐데, 그렇다고 호두가 여기서 직접 '내가 제일 잘난 사람이야!'라고 할 것 같진 않거든.

그리고 은근슬쩍 종려를 카메라에 비추는 게 조금 수상하다.

어이쿠, 핑계 하나는 또 그럴듯하네. 무한한 번성과 새로운 한 해에도 나날이 발전하기를 기원하는 게 목적이라니…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호두의 말이 끝나자마자 벤티가 종려에게 이니시를 건다. 그래, 모락스 놀려먹길 좋아하는 바르바토스가 이걸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지.

아니, 일단 종려와 벤티는 서로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사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종려를 띄워준다고?

다들 아는 게 힘이라고들 하잖아. 그럼 객경은 무한한 힘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지.

이거, 분명 종려의 정체가 모락스임을 에둘러 말하는 게 분명하다. 신의 심장이 없는 지금도 모락스는 티바트에서 셀레스티아를 제외하면 무력 1위라고 하거든.

종려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난 그저 기억력이 좋을 뿐이오"라고 말하며 호두가 여기서 제일 존귀하다고 말한다.

이거, 평소 호두에게 당한 게 있으니, 호두에게 폭탄을 넘긴 게 분명하다.

앗, 안 돼요. 부하가 상사에게 알랑방귀를 뀌다니. 귀한 손님이 하는 거라니까요. 주최자인 저는 손님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호두는 귀한 손님을 뽑는 거라며,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간다. 칫, 이렇게 빠져나가다니.

그러더니 "밥도 맛있게 먹었으니, 여기 유일한 주방장인 향릉이 하는 건 어떨까요?"라며 향릉에게 폭탄을 돌린다.

아니, 향릉 말처럼 향릉은 여기 요리를 하지 않았다고.

그러자 호두는 향릉이

  • 선인(평 할머니)의 제자
  • 부뚜막의 마신(마르코시우스)의 동료
  • 축월절 요리왕 대항전 우승자
  • 만민당의 유일한 후계자
  • 호두의 친구

라며 향릉을 띄워준다.

왜 어째 갈수록 페이몬 말처럼 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게다가 저 마지막의 '호두의 친구' 역시 '향릉이 대단하긴 하지만 나도 대단해!'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잖아?

 

이 와중에 행추, 벤티, 중운은 향릉에게 손뼉을 친다. 이거 다들 향릉이 폭탄을 받았다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아니 ㅋㅋㅋㅋㅋㅋ

향릉이 행추에게 폭탄을 넘기자, 행추는 손뼉을 치다 말고 기겁하고, 중운과 벤티는 향릉에게 손뼉 치던 자세 그대로 행추에게 손뼉 친다.

난 얘네들 손뼉 치는 게 너무 웃겨! '어차피 난 아니니까!'라며 손뼉 치는 거 아냐 ㅋㅋㅋㅋㅋㅋ

호두도 한 손 거들어서 "상회의 도련님이 향을 피우면 올해엔 다들 부자가 될 거야"라고 한다.

행추 말대로 전혀 상관없잖아 ㅋㅋㅋㅋㅋㅋ 하지만 호두 말처럼, "문제 될 거 없지!"

하지만 여기서 얌전히 당하고 있을 행추가 아니다. 곧바로 "퇴마에 능하고, 모두의 안전을 지키는 중운 도사"가 더 존귀하다며 중운에게 폭탄을 돌린다.

심지어 중운에게 폭탄을 돌리자마자 얄밉게 중운을 향해 손뼉을 친다.

중운 역시 자신에게 폭탄이 굴러들어 오자 기겁한다. "아? 왜 또 나야?"라니, 행추에게 얼마나 당했으면 저런 말이 나올까 ㅋㅋㅋㅋㅋㅋ

그러고선 '항마대성이 더 퇴마와 수호의 공이 높으니 항마대성이 더 존귀한 손님이다'라며 소에게 폭탄을 넘긴다.

갑자기 소가 차갑게 "사양하지"라고 말한다. 아, 설마 여기서 폭탄 돌리기가 끝나버리는 건가? 그럼 재미없는데…

어… 설마 종려가 더 존귀한 손님이라며 종려에게 폭탄을 돌리진 않겠지?

으… 으응? 나? 소가 지목하는 게 여행자였어? 심지어 호두, 향릉, 벤티, 중운 모두가 팔짱을 끼고 게슴츠레 여행자를 바라본다.

아잇, 페이몬 너마저!

하지만 여기에 당할 여행자가 아니다.

거울을 봐.

곧바로 페이몬에게 폭탄을 던진다.

낯짝 두꺼운 페이몬은 사양할 생각을 전혀 않고 에헤헤 헤실댄다.

좋아, 이제 이 폭탄은 페이몬 거다!

이 기세를 몰아 종려와 벤티도 페이몬을 칭찬한다. 그래, 그래, 계속하세요! 아주 좋아요!

폭탄 돌리는 건 맞지만, 페이몬이 있어 원신이 재미있던 건 맞는 말이다.

암암, 거짓이라고는 단 한 스푼도 들어가 있지 않다고.

의도치 않은 결과지만, 페이몬의 삐짐도 풀 수 있었다.

거기에 '친구끼리는 원래 싸우며 지내는 거다'라는 훈훈한 마무리까지.

그래서 오늘 '제일 존귀한 손님'은 페이몬이 되었다!

페이몬의 낯짝이 두꺼워서 참 다행이야. 만약 여행자가 걸렸으면 낯부끄러워 속이 다 뒤집힐 뻔했잖아?

ㅋㅋㅋㅋㅋㅋ 다들 손뼉 치는데 호두 혼자 덩실덩실 춤추는 거 봐 ㅋㅋㅋㅋㅋㅋ

그래서 페이몬은 '오늘의 제일 존귀한 손님'이 되었고, 향에 불을 붙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아, 이 이야기 보길 정말 잘했다. 보는 내내 배꼽을 부여잡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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